테크니컬 라이터의 어두운 면

Ragina Jeon
8 min readDec 15, 2022

우리나라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는 소수다. 지난 10여 간 수요가 늘고 채용하는 회사도 늘었지만, 여전히 테크니컬 라이터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소수라서 좋은 점은 블루오션이라는 것이다. 요즘처럼 테크니컬 라이팅 직무가 늘어나는 시기에는 특히 그렇다. 일자리가 많지 않으니 전공 과목이나 교육을 찾기 어렵고, 그래서 숙련자도 드물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공급이 적으니, 그를 채용하려는 회사도, 테크니컬 라이터 커뮤니티도,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직무의 좋은 점만 말한다.

어쩌면 나도.

온라인 지인이 책을 한 권 선물해줬다.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에서 일하는 여러 분야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실은 <실리콘밸리의 목소리>라는 책인데, 테크니컬 라이터 이야기도 있다.

<실리콘밸리의 목소리>

제목에 ‘실리콘밸리’가 들어가는 책은 흔히 수많은 개발자와 엔지니어가 꿈꾸는 멋진 직장과 성공한 삶을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이 책은 그 흔한 법칙을 깨뜨렸다. 여기서 다루는 건 거대 테크 기업의 어두운 면이다.

이 책에서 테크니컬 라이터가 말한 어두운 점은 크게 두 가지다.

  • 직무 평가 절하
  • 성별 문제

실상 이 둘은 하나로 이어진다. 테크니컬 라이팅을 평가 절하하는 건 테크니컬 라이터에 여자가 많기 때문이기에.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테크니컬 라이팅이란 일이 존재했고, 세계의 기술을 선도하는 실리콘밸리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와 유사한 문제가 있다니 놀랍기도 하고, 피상적인 이미지만 보고 그곳은 어련히 천국일 거란 환상을 품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다.

놀람과 환상은 저쪽으로 밀어두고, 그 어두운 점을 하나씩 짚어보자.

직무 평가 절하

직무 이름에 ‘테크니컬’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테크니컬 라이터는 기술직이 아니라는 편견이 만연하다.

대체로 그다지 높게 평가해주지는 않아요. (중략) 글 쓰는 걸 소프트 스킬로 취급하기 때문에 제 말을 중간에 끊고 다른 얘기를 하거나 깔보듯 얘기할 때도 있죠. 완전히 인문학도로 보는 거예요.

— <실리콘밸리의 목소리>에서 발췌

나도 테크니컬 라이터로 전향한 후 가장 크게 느꼈던 문제점이다. 그래서 세미나, 인터뷰, 기고 등으로 이런 인식 — 테크니컬 라이터는 ‘글만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 을 바꾸려고 노력해왔다. 주로 쓴 방법은 기술을 잘 아는 테크니컬 라이터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라이터’가 아니라 ‘테크니컬’에 방점을 찍자는 것이다. ‘테크니컬 라이터’보다는 ‘문서 엔지니어’라는 말을 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편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왜 그런 편견이 생겼는지 생각해봤다. 내 추론은 이렇다.

번역에서 시작된 테크니컬 라이팅

우리나라에서 기술 문서가 필요해진 건 아마도 해외 고객이 요청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문서를 영어로 작성하거나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채용하게 됐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잘하면서 기술까지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테크니컬 라이팅은 기술 전문가보다는 언어 전문가로부터 시작됐을 것이고, 테크니컬 라이터는 기술직이 아니라는 고정 관념이 생겨났을 것이다.

근거 없는 추론이지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테크니컬 라이팅을 번역과 한 묶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은 걸 보면(심지어 테크니컬 라이팅은 필요 없고 번역만 해달라는 요청도 있다) 완전히 잘못된 추론은 아닐 것이다.

기술직이 아니라는 편견은 왜 나쁠까?

인터뷰이는 “테크 업계에서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기술 인력으로 여겨지느냐에 좌우된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인력인지 아닌지가 연봉을 좌우하기 때문에 나쁘다는 말이다.

연봉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몇몇 대기업처럼 연봉 테이블을 공개하는 곳이 아니라면, 대다수 IT 회사는 기술직과 비기술직 간에 연봉 차이를 둔다고 한다.

미국에서 테크니컬 라이터의 평균 연봉은 소프트웨어 개발자 평균 연봉의 약 82%다(PayScale 자료 기준). 우리나라엔 공개된 비교 자료가 없는데, 지인에게 비공식적으로 물어본 바에 따르면 개발자보다 연봉이 5–10% 적다고 한다.

개발 직무를 해 본 사람으로서, 개발자가 이 정도 더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직무든 어려움이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 보자. IT 업계에서 개발자보다 더 힘든 직무가 있을까? 개발할 때는 밤을 새우거나 퇴근했다가 불려 나가는 일이 수두룩했다. 그 스트레스를 돈으로 보상받는 것으로 생각하자.

그럼 적은 연봉 말고도 나쁜 점이 또 있을까?

있다. 테크니컬 라이팅과 전혀 관계없는 업무를 요청하는 게 예다. 번역이나 회의록 정리, 남의 발표 자료 다듬기 같은 것 말이다. 테크니컬 라이팅에서 ‘테크’는 빼고 ‘라이팅’만 생각하니까 벌어지는 일이다. (“번역이나 회의록이나 어차피 글쓰기잖아?”) 정작 기술 문서는 엉망으로 써놓고, 그걸 맡길 생각은 안 한다. 왜? 기술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성별 문제

미국에서 테크니컬 라이터를 비 기술직으로 인식하게 된 데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터뷰이는 그 이유를 성별에서 찾았다.

다수의 테크니컬 라이터가 여성이에요.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팀 전체가 여성이고요. 그리고 테크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여성은 기술 인력이 아니라는 인식과 맞서고 있어요.

— <실리콘밸리의 목소리>에서 발췌

심지어 출산 휴가를 쓰려다가 해고된 이야기도 했다. 이건 당시 인터뷰이가 다니던 회사 문제지만, 테크니컬 라이터에 여자가 많다는 걸 생각해 볼 때 한 번 고민해볼 부분이긴 하다.

쉬면 뒤처진다

한번은 급한 프로젝트를 맡아 두 달가량 야근했다. 회사에서 집에 가는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곳까지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늦은 시각에 나와서 터덜터덜 그 길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가!

아이가 있다면 그 시간에 퇴근해도 쉬지 못하고 아이를 챙겨야 했을 테니까.

물론, 아이가 있었다면 애초에 그 프로젝트를 안(못) 맡았을 것이다. 그걸 안 한다고 해고되거나 위기에 처하는 건 아니지만, 업무 선택의 폭이 줄어들고 나아가 상사가 일을 맡길 때 우선순위에서 배제된다. 그러면 중요하고 큰 프로젝트는 못 맡을 가능성이 크다. 임신한 상황이면 더 그렇다.

업계를 몇 달 떠난 사람은 이미 뒤처졌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이 기술은 너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놓쳐버리면 자격 미달이 된다고 생각해요.

— <실리콘밸리의 목소리>에서 발췌

회사에 단 한 명뿐인 테크니컬 라이터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는 건 비단 테크니컬 라이터만이 아니다. 하지만 테크니컬 라이터는 한 회사에 단 한 명일 가능성이 큰 편이다. 당시 인터뷰이의 회사에도 테크니컬 라이터는 인터뷰이 혼자였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테크니컬 라이터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을 했는데, 사내에 테크니컬 라이터가 몇 명이냐는 질문에 ‘혼자’라고 대답한 사람이 47명 중 13명이었다.

회사에 단 한 명뿐인 테크니컬 라이터가 마음 편히 육아 휴직을 쓸 수 있을까?

테크니컬 라이터의 단점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회사 이름을 건 공식적인 자리여서 대놓고 나쁜 점을 말하진 못하고, “으레 기술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테크니컬 라이터를 대하지 말아달라”고만 했다.

테크니컬 라이터가 기술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선 주변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테크니컬 라이터들,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시간을 잘 쓰고 있는가?

I’d Rather Be Writing 사이트를 운영하는 테크니컬 라이터 Tom Johnson은 업무 중 글 쓰는 시간이 10%라고 했다. 이 책의 인터뷰이도 비슷하다.

테크니컬 라이팅에서 글쓰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 10%밖에 안 돼요. 업무의 일부분일 뿐이에요. 일하는 시간 대부분은 자료를 조사하고, IA(information architecture)와 콘텐츠 전략을 들여다보는 등 관련된 모든 분야에 할애하거든요.

— <실리콘밸리의 목소리>에서 발췌

우리나라 테크니컬 라이터는 어떨까? 마침 전에 했던 설문조사에 그 항목이 있었다.

꼼꼼하게 측정해보지 않았지만, 내 업무에서 글쓰기는 20–30% 정도 된다. 그런데 글쓰기 비중이 60% 이상을 차지하는 사람이 49%에 가까워서, 나로선 놀라운 결과였다. 당시에는 “와, 다들 글 많이 쓰네”에서 그쳤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글쓰기 비중을 줄이고 기술 지식을 쌓고 진짜 테크니컬 라이터가 하는 일이 뭔지 알리는 데 좀 더 시간을 투자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코딩을 배우는 게 아니라 기술을 가까이 해야 한다

이따금 개발할 줄 알아야 하느냐고 묻거나 개발 경험이 없으니까 코딩을 배우겠다는 사람을 본다. 코딩을 배워서 샘플 코드를 직접 작성해 보겠다면 권장하지만, 단순히 기술 지식을 쌓겠다고 코딩 교육을 들을 거라면 말리고 싶다.

기술 지식은 코딩해서 쌓이는 게 아니다. 기술 서적이나 포스팅을 꾸준히 읽고, 잘 쓴 기술 문서를 참고하고, 맡은 제품을 직접 사용하다 보면 차츰차츰 지식이 쌓인다. 그런 다음 직무 범위 밖의 업무가 들어오면 과감히 거부하고, 기술 문서가 필요한 일이 보이면 내가 할 일이라며 달라고 해 보자. 그러다 보면 “저 사람은 기술적인 업무를 한다”고 알아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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